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남북으로 분열 되었습니다. 남쪽에는 유다와 베냐민 두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을 지도자로 삼아 남았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나머지 열지파가 모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지도자 였던 여로보암은 그가 비록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아서 왕이 되었지만 사실 정통성이 약한 다시 말하면 영적 능력이 부족한 자였습니다. 여기서 영적 능력이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영적 능력이 없는 자가 그래도 소위 선민 공동체 즉 신앙 공동체로 불리는 이스라엘에 그것도 12지파 중 10지파를 관할하는 왕이 되었으니...솔직히 자기 스스로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여로보암은 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나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전전긍긍했습니다. “우리 10지파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 하러 갔다가 그곳에 눌러 앉아 버리면 어떡하지?” 바로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황금 송아지였습니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이 북이스라엘의 10지파 사람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여로보암의 말을 따라 성전에서 만나주시던 하나님을 버리고 황금 송아지를 좇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신들을 선민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알고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순식간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섬기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맘대로 살고자 하는 것 또 어려운 일은 싫어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것 등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남게되어진 본성이기에 사실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몸의 편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걸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도 없다고 하지 더군다나 황금송아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니 내 마음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고 얼마나 살기가 쉬워졌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속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자 그들에게 경제적 번영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얼마나 그들의 선택이 바른 것이었겠습니까? 잘 못된 것이라면 잘 안돼야 되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나라도 강성해 지니까 그들은 추호도 자신들이 잘 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최소한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오늘 교회 개혁을 위해 모인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왜 이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제가 볼 때 오늘날 한국 교회는 분열 왕국 당시의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를 보면 영적 능력이 없는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자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영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치리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 통치권을 잃어버릴 까봐 전전긍긍하며 결국에는 거짓 신앙의 내용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 신앙입니다. 주일 성수에 십일조 잘하고 성전이라 이름 붙여진 건물을 올리는데 좀 무리해서 투자하고 거기다가 금주하고 금연하면서 지도자들만 잘 섬기면 뭘 하든지 잘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도 안 돼는 내용이 한국 교회 내에서는 성도들에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음성을 따라 이 땅에서 온전한 섬김의 삶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보다 기복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길이요 자신들의 성정에 맞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기복 신앙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에도 경제적 번영이 찾아 왔습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도 이대로 가다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처럼 멸망당하기 전에는 전혀 그것이 잘 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정말로 하나님의 크나큰 징벌 앞에 놓이기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거듭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니 제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발견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맺어 지는 관계입니다. 또한 이 관계는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약속대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유지되어지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관계를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 “주님 주님이 아시시면 안됩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고백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기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모습일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임인 교회도 이제는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이 땅에 성육신 하셨다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이 땅에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으로 이 땅에 남기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들을 교회로 계속 이어서 하게끔 이 땅에 교회를 두셨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조건적인 섬김과 전도, 즉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조건 없이 사람들을 구제 하셨던 일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를 말씀을 통해 능력가운데 선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교회는 오늘날 어떠한 일 보다 이 두 가지일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들을 이어서 하는 사명을 잊지 말고 감당해야 한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일은 초대교회에의 모습을 살폈을 때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들입니다. 즉 초대교회에는 집사와 장로의 직분이 있었는데 집사는 직분의 시작부터가 구제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장로는 (요한 사도 같은 분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했는데)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주로 집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 교회도 그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찾아 그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숭사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들을 더 체계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숭사리의 목표중 하나가 바로 의식개혁입니다. 바로 이 의식개혁이란 것이 가르쳐 제대로 알게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일에 매진해야 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능력 가운데 말씀 선포했던 선지자가 일어섰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운데서도 그러한 선지자 같은 일군들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마 이 일은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선지자들 처럼 순교(물론 오늘날 육체적 죽음의 순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멸시를 받고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도 정신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를 각오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고 계신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부름심은 여러분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들어야 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일을 우리 숭사리가 하는데 있어서 더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서 나누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사실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로부터 더 많은 좋은 의견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숭사리 아카데미와 같은 오프라인 사역을 제안합니다. 물론 비슷한 일들을 기독 청년 아카데미와 같은 곳에서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숭사리에서도 온오프라인을 망라하는 아카데미 사역을 감당함으로 좀 더 적극적인 교회 개혁 사역에 뛰어 들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 당장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일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기도라도 같이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이 이 시간 이후에 여러분들의 더 좋은 의견들이 많이들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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