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주님 앞에서 날마다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믿음은 바른 앎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조금도 오해할 수 없는 분명한 단어와 어휘를 사용하여 하나님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말씀은 마태복음 6장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알지 못하신다는 그릇된 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사정을 모르신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내게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늘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야 할 것을 어린아이 자신이 정확하게 압니까, 부모가 더 잘 압니까? 당연히 부모가 더 잘 압니다. 지금 밥을 목어야 할 때인지, 무엇을 보아야 할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때인지, 부모가 더 잘 압니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엄마, 아침밥 주세요. 점심밥 주세요. 저녁밥 주세요.”라고 요구하고서야 부모로부터 밥을 얻어먹습니까?
오히려 자식은 노느라고 밥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부모가 먼저 챙겨 주는 법입니다. 만약 자식이 먼저 달라고 해야만 얻을 수 있다면, 그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절대로 친부모 자식의 관계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 자신보다 부모가 더 잘 압니다.
대체로 아이들이 달라고 조르는 것은, 과자나 초콜릿이나 만화책처럼 없어도 좋은 것들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미리 알고 챙겨 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없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해서 생명인 공기를 얻었습니까? 우리가 어젯밤에 철야기도를 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태양이 떠올랐습니까? 우리가 40일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비가 내렸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곡식이 주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정작 있어야 될 것들은 한 가지도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달라고 주님을 조르는 것은 실상 우리 삶에서 없어도 좋을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신다.’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모르신다’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 믿음의 질이 달라집니다.
구하기 전에 아신다.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러므로’에 밑줄을 긋고 주목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그러므로’ 같은 단어가 나오면 대단히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그러므로’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6:9상)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님의 기도’, 즉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알고 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 믿음의 성숙을 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를 별 생각 없이 되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새로운 성숙한 삶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결단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하)
이 기도문은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나의 삶에 의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바랍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아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하)
이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6:11)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용할 양식을 없어서 죽는 사람들의 비율은 미미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자족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 더 이상 욕망의 노예가 도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이것은 이제부터 용서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그처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 이제부터 그분의 뜻을 위하여 내 삶을 바쳐 드리는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시는 마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끝납니까?
“너희는 먼저 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어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6장은 이렇게 끝납니다.“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6:34).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 중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로 끝난다면, 마태복음 6장의 의미를 속시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구절은 마치 오늘 밤12시까지는 오늘 걱정만 하다가 12시 종이 땡치면 내일 걱정을 시작하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이 부분은 완벽한 오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 본문에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로 되어 있어 ‘내일’ 이 이 때를 가리키는 부사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원문은 ‘내일이 부사가 아니라 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주력하라. 그러면 네게 내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내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내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숙소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루는 밥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는 중에 가위를 씻다가 잘못해서 고무장갑 손가락을 찢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장갑을 말린 뒤 찢긴 자리를 노란 테이프로 감았는데도 설거지를 할 때마다 물이 스며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제네바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고무장갑을 사야 하나 생각하는데 벨이 울렸습니다. 나가 보았더니 미국에서 등기소포가 왔습니다. 그 속에는 고무장갑이 한 세트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남자 아닙니까? 그런데 남자한테 고무장갑이 소포로 온 것입니다.
그날 오후에 장갑을 보내 주신 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참 잘 받았노라고 감사를 드린 뒤에, 어떻게 고무장갑을 보낼 생각을 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이재철 목사님에게 고무장갑을 한 세트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 길로 슈퍼에 가서 고무장갑을 사서 속달로 부쳤지요.”
그분이 고무장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슈퍼로 나가던 그 시간은 바로 제 고무장갑이 찢어진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합니다. 그저 설교 원고를 칠 수 있는 정도지요. 그러니까 컴퓨터로 주보를 짠다든지, 도표를 만든다던지 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네바로 가면서 ‘이제 모든 것을 나 스스로 해야 할 텐데 주보를 어떻게 짜나, 교우님들께서는 상당히 죄송하지만 몇 달 동안은 원시적인 주보로 대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네바에 갔더니 우리 나라 정부에서 파견 받아 저보다 6개월 먼저 와 계신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분 전공이 ‘주보편집’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에게 찬송가 장수만 알려드리면 나머지는 그분이 다 알아서 편집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아이가 넷 있습니다. 대다수 부모님들이 그러시겠지만, 아이들이 많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어떤 아이에게 소홀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희 집에서는 둘째 아이가 그랬습니다. 그 아이가 커 오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그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99년에 중학교를 입학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해 11월에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아이들이 정작 아빠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곁에 있어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중학교를 입학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인생에 큰 매듭을 짓는 중요한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홀로 외국에 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다면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스위스에서 한국까지 간다는 것이 적은 경비가 드는 일이 아니어서 고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이 아이에게 아빠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습니다. 남서울 교회 이철 목사님이었는데, 와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둘째 아이의 입학식 때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게 아닙니까? 일주일만 생각하고 답변해 드리겠노라고 했지만, 실상은 일주일씩이나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남서울교회가 보내준 표로 비행기를 타고 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비행기표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에 고무장갑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보 편집할 줄 아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구하지 아니해도 있어야 될 것을 아시는 주님과 교제하며 살기 원하는 제가 저 자신의 소용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시든지 주시는 분이시오. 내게 필요 없는 것은 아무리 간구해도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기도의 목표와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것인지, 오늘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 주님을 위하여 나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어야 될 것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부터 성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9절부터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덕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세상에 둘도 없는 협잡꾼이나 사기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도둑놈도 도둑질을 해서 자식에게 좋은 과외공부를 시켜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 된 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문법적인 형태상 비교급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로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내게 있어야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상생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한 바가 무참하게 깨어질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개업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있어도 폐업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내가 실패한 바로 그때, 더 좋은 것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나의 계획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을 때 우리는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인 동시에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 실패 속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기 원하시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실패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하기 때문에, 정말 인생의 전환기가 될 수 있는 실패를 맞이하고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질병 속에 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그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창세기32장을 보면, 형 에서에게 사기를 쳤던 야곱이 20여 년 동안 삼촌 라반 집에서 살다가 그 속에서도 불의하게 재산을 모아 더 이상 거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형 에서에게 얼마나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지 일행을 세 떼로 나누어서 먼저 선물을 보내고 식구들이 얍복강을 다 건너간 후, 자신만 홀로 남아서 밤새워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 밤에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응답하셨습니까? 야곱의 환도뼈를 꺾어서 다리를 절게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오히려 그의 몸을 불구로 만드셨습니다. 만약 야곱이 그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인생은 또 달라졌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형 에서가 칼잡이 400명을 대동하고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동생을 죽이겠다고 폭력배들을 동원한 형이 동생에게 뛰어와서 그 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순간 야곱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상상해 보면 금방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20년 동안 사기 친 결과 모은 재산으로 비단옷을 입고 기름기가 흐르는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여지없이 에서의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에서는 분명히 그런 모습의 동생을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의 몰골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밤새워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고 옷은 구겨져 있고 땀에 젖어 있으며,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은 다리까지 절뚝절뚝 절고 있습니다.
그때 형 에서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의 사랑이 왜 회복되지 않았겠습니까? 에서는 이제 불구자의 몸으로 돌아온 불쌍한 동생에게 뛰어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절게 된 일은 고통이나 벌이 아니라 야곱을 살려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 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여기에서 ‘율법’은 율법서를, ‘선지자’는 예언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단어를 합치면 구약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구약의 핵심은 남이 자기를 대접해 주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믿음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바뀌면 만나는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순종한다는 것은, 바뀐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잣집 아들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수용했습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그를 국무총리로 삼아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죄명으로 장인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왕이 구성한 특공대 삼천 명을 피해 다니면서 이곳 저곳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모여드는 모든 억울한 사람들, 600명에 달하는 그 사람들을 먹이면서 섬겼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임금이 되고 난 뒤에도 기층민들을 사랑하는 참된 성군으로 성경의 역사에 기록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병약해졌습니까? 그래서 병원에서 나의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벗하며 살고 계십니까? 그분들을 받드십시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셨습니까? 그래서 만나는 부류의 사람들이 달라졌습니까? 그분들을 섬기십시오. 그 만남 속에 더 좋은 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열매 맺혀 가고 있습니다.
그의 나라를 주신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누가복음12장 31절부터 32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는 자들에게 그의 나라를 송두리째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통치권자들은 나라의 권력을 홀로 독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송두리째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믿을 때 이 세상에 우리는 '모순의표적‘으로서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유태인의 율법에 따라서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 시므온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마리아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 한 말이 누가복음2장 3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시므온은 예수님을 가리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고,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온 예루살렘이 떠나갈 듯이 “저자를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유대인들의 비방 속에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문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비방하고 죽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방 받는 표적’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세메이온 안티레고메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sign of contradiction'이 됩니다. ‘contradiction'이라는 단어에는 ‘비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비방의 표적’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contradiction'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바로 ‘모순의 표적‘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모순의 표적입니까?
우리는 자고로 처절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상대를 마구 짓밟고 일러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정말 높아지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남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손을 움켜쥐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펴서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나님의 것으로 차고 넘치리라”고 하십니다.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악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정말 영원히 살고 싶으냐? 그러면 먼저 죽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제왕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갈릴리 출신의 빈민에 불과했습니다. 그 예수님은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나를 믿고 나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순의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모순의 표적으로 보였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욕망의 노예 된 인간들이 모순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모순에 빠져 있을 때, 오히려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순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이간을 섬겼던 예수그리스도는 종이기는커녕 만왕의 왕으로 섬김을 박고 계십니다. 당신의 목숨을 미련 없이 버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손을 펴서 당신을 위하여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으셨던 주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성자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 치고 하나도 모순인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분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꽃밭 위에 꽃병들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엎어진 꽃병들은 꽃과 자기 땅이 생겼다는 기쁨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제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기 소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기가 통하지 않는 그 꽃병 속의 꽃은 시들고 죽어 갑니다. 그뿐 아니라 죽은 꽃은 대지의 습기와 지열 때문에 마침내 썩어 가기 시작합니다. 꽃병 속은 악취로 진동합니다. 그럼에도 그 꽃병은 ‘이것이 나의 모든 것’이라며 그 썩은 것을 가슴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바로 세워진 꽃병을 가져다놓습니다.
엎어져 있는 꽃병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세워져 있는 꽃병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순에 빠진 꽃병들로부터 역으로 모순의 표적이라고 비난을 받을지언정 참 진리의 모습의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꽃병이 있어야, 모순에 빠진 꽃병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순에 빠져 있는 이간들에게 참 진리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거꾸로 모순의 표적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욕망의 법칙, 인간의 허욕의 법칙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진리를 위한 모순의 표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나라를 송두리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모순과 반대되는 모순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모순에 빠진 사람들로부터 모순의 표적이 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진리의 모순이라고 판정을 받든 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한번은 모순의 표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냐 사람 앞에서냐, 일시적이냐 영원한 것이냐, 진리 안에서 모순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욕망의 법칙에 익숙하게 살아간다면, 그 모순으로부터 상반되는 모순의 표적이 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모순의 표적이라 비방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참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00년 교회사를 되돌아보십시오. 모순에 빠졌던 인간들은 끊임없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했던 자들은 이 세상에서 모순의 표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더 이상 욕망의 사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 걸쳐서 불의에 찬 우리 조국은 모순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모순의 표적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순은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이재철 / 회복의 신앙 - 무엇을 믿을 것인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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