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신도의 외침] Bad Cycle에 휘말린 교회들 / 당당뉴스에서 펌
* 미주 이민교회의 실상을 다루는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 필명으로 올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장로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Bad Cycle에 휘말린 교회들"은 필자의 25회째 연재 중인 글의 6번째 연재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당당뉴스가 책임지고 실명을 보호합니다. (당당뉴스 운영자)
뉴욕과 뉴저지의 한인교회 90%는 작은 교회들이다. 자체건물이 있는 교회, 미국교회를 빌려서 사용하는 교회, 일반 건물을 렌트한 교회, 심지어 오후에 한국교회를 빌려서 사용하는 교회도 있다.
목회자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예배의 내용과 주보만을 보면 그 교회 성도들의 수준과 목회자의 영성을 파악 알 수 있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교회는 자체건물도 있고 목회자가 설교도 굉장히 파워풀 하게 하는데 성도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
목회자가 노력하는 것 만큼 성도들이 모이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라고 한다.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문제나, 물질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150명 정도 조금 모였다 하면 반이상이 떨어져 나가고 모였다가 1년도 못되어 금방 흩어지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서 교회에 가보니 과연 목회자의 지성적인 설교가 대단히 뛰어났다.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기에 솔직히 아까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몇 천명이 들었으면 좋을 정도로 뛰어난 설교가였다.
차라리 신학생들이 들었으면 더 좋을 정도로 대단한 설교가 였다.
그런데 예배를 진행하는 가운데 참으로 우스운 일이 있었다.
교인들수가 50명도 되지 않는데 헌금을 거두는 사람들 수가 자그마치 6명이나 되었다.
까운을 걸치고서 예배시간에 헌금주머니를 돌리는 것이었다.
요즈음 별난교회를 빼고는 젊은 목회자들이 있는 한국교회의 90%이상이 들어오는 입구에 헌금통을 마련해 놓고 있는데
그 교회는 교인 50여명에 헌금위원 6명이 헌금주머니를 돌리면서 헌금을 거두는 것이었다.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헌금위원들이나 주위 사람들 앞에서
헌금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헌금낸 사람들의 이름을 항목별로 나누어 주보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1980년대까지 많은 교회들이 하였지만
40대 50대초의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요즈음의 현대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주보에 적힌 헌금액수를 보니 교인들이 헌금을 열심히 하는 흔적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은
강요된 의도성이 있는 헌금형태와 주보임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교인들이 그러한 반강요식의 헌금 형태나 주보형태를 바꾸자고 목회자에게 건의하여도
목회자가 고집을 절대 꺾지 않는 것같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헌금주머니를 돌리는 것이나 주보에 헌금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의도성이 무엇이겠는가?
정말 성도들로 하여금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 사랑하도록 하는 의도가 아닐 것이다.
몇 %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헌금을 더 내도록 유도하겠다" 는
교육적 차원을 빌미로 "어리석은 꼼수이자 자살골" 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헌금주머니를 돌려서 헌금을 거두는 교회와 입구에 헌금통을 설치하여 헌금하는 교회의 헌금 액수를 비교하면,
헌금통을 설치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내는 교회가 훨씬 헌금액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통계조사에 나와 있다.
물론 양쪽 다 동일한 수준의 교회라는 전제이다.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헌금자의 이름을 주보에 공개하는 그 교회의 설교자는
그럴 듯하고 멋있는 설교를 하면서 결국
"의도성이라는 베드사이클" 에 걸려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자원하는 마음의 귀중성"을
자신의 어그러진 목회스타일 때문에 빼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인들이 한 교회에서 헌신하는 모양은 헌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가대, 찬양대, 식사준비, 교사, 심방, 안내, 전도, 중보기도, 훈련, 상당 사역등의 분야에서
헌금만큼 중요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헌금자의 명단을 올리는 것과 똑같이 그러한 사역에 섬기는 사람들의 이름을 주보에 늘 올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결국 목회자가 헌금을 부각시키는 것은 돈이 다른 것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는
세속적인 모습을 계속적으로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지금 현대 교회의 교인들은 잘 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목회자의 돈에 대한 가치관과 의식"에 대하여 예상외로 민감하다. 목회자의 돈문제로 인하여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얻어 먹는 90% 이상이 물질문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액수만을 매주 공개하는 것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헌금을 매주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보고되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교인들이 바친 헌금 1센트도 하나님이 직접 사용할 수 없다. 전부 사람들이 집행하고 사람들이 사용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교인들에게는 헌금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고 강조해 놓고서는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들어오는 헌금은 분명히 하나님께 바친다고 기도도 하고 봉헌기도도 하고 있는데, 거두어진 헌금이 집행되는 나가는 돈 가운데 하나님께서 단 1센트도 사용치 않는 돈이라는 논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헌금을 내는 사람도 사람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결국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믿으면 되었지 그 후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70년대 80년대 한국의 막가파 부흥사들이 잘 사용하였던 상투적인 수법들이었다.
헌금을 내는 사람들의 이름과 목적을 매주 공개한다면 당연히 헌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용도도 공개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교회들이 거의 없다.
결국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예배시간에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매주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올리는 의도성은 결국 좋은 의도는 사라지고
"헌금을 더 거두겠다"는 의도성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신자들이 단순하고 순수하였을 때는 매 예배시간마다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주보에 이름을 올려도 그러려니 하고 따라 주었다. (지금도 순복음교회는 모든 예배시간에 항상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있다). 지금 교인들은 헌금의 패턴과 주보의 패턴 속에 담겨있는 목회자의 의도성을 꿰뚫어 볼 정도로 단순하거나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도가 불순하면 금방 불신이 쌓여, 목회자가 아무리 뛰어난 설교를 하야도 반감만 늘어갈 뿐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목회자가 조그만 실수라도 드러나면 폭발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헌금주머니를 열심히 돌리고, 설령 주보에 이름을 올린다 하여도 목회자가 그 헌금의 계수와 집행에 일체 관여하지 않거나 헌금의 사용처가 복음전도와 교육과 선교와 구제에 집중하는 것을 교인들이 안다면 교인들은 분명히 열심히 헌금을 할 수도 있다.
목회자가 영적 리더쉽에 있어서 순수성을 상실해버린채 의도성에 함몰된 배드사이클에 걸린 상황에서 아무리 뛰어난 설교를 하여도 그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을 낸다고 하여도 결국 사람들의 눈과 체면 때문에 억지로 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의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면의 갈등을 겪다가 결국 교회를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민교회들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배드사이클" 의 트랩에 걸리면 빠져 나오기 힘든 모양이다.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주보에 헌금자명단을 올리는 그 목회자에 취재 가운데 커피를 마시면서 이제 그만 하시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우리교회 교인들 수준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다" 라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목회자에 대하여 불신하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분의 목회신학에 엄청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초신자들은 무엇인가 행해야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일단 성가대도 하고, 헌금도 하고, 교회봉사도 하면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헌금주머니를 돌려서라도 헌금을 하게 하고,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올려서라도
헌금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결국 헌금함으로 믿음이 생기도록 도와준다"는
차원하에 한다는 것이었다. 야고보서를 인용하기 까지 한다.
그것은 완전 궤변이며,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며,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부흥하지 않는 이민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겪고 있는 오류인지도 모른다.
믿음은 훈련이나 강요나 틀에 몰아 넣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며,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종과 행함은 믿음의 열매인 것이지 순종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주어지면, 누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행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그 중간에 목회자들이 임의로 개입하여 자기 의도성을 블아 넣게 되면 결국 자원하는 심렴이 가지는 은혜와 기쁨과 축복이 전부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영적비밀을 목회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이 걸려도 교인들에게 자원하는 심령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성도도 살고,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아름답게 성숙해질 것이다.
무엇을 행함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거짓이며,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행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형식주의적인 위선자들이 되고, 결국 망하게 되는 율법주의적인 사고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이 생기도록 하고 싶다면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만 열심히 가르치고 복음대로 사는 삶과 인격을 나누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역사로 교인들의 믿음은 날로 자라나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깡통교회라고 불리는 미군격납고를 개조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전주안디옥교회는 교인 1만명에 65억헌금이 들어오면 50억을 선교헌금에 사용한다. 그리고 그교회 담임목회자는 전용차도 없었고, 전용목양실도 없었고 사례도 쥐꼬리만 하였다고 한다. 바치는 십일조 전액을 복음전도사역에 사용하였지만 모자람 없는 교회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한 선교는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어떤 대형교회는 십일조, 선교헌금, 건축헌금, 심방헌금, 구제헌금, 건축헌금, 생일감사헌금, 승진감사헌금, 이사감사헌금, 취직감사헌금, 구역헌금, 주정헌금.....헌금봉투에 수없이도 많은 항목을 만들어서 헌금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전도비는 5%도 되지 않는다. 왜 그렇느냐고 물어보니 선교헌금으로 낸 돈이 5%밖에 되지 않았다는 궤변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온갖 명목으로 철마다 부흥회를 열어서 성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교회들이 한 두 곳이 아니다.
헌금 거두는 방법과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올리는 믿음 없는 스타일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사람들이 모이면 흩어지고, 또 모이면 또 흩어지는 어려움을 계속적으로 겪으면서도 목회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민교회에서 그러한 고뇌 속에서 "배드사이클"에 걸린 목회자들이 한 두명이겠는가?
배드사이클에 걸린 목회자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기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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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편51:1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8:1-8)"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역대상29:9)"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5:2)"
케이스스터디
헌금주머니를 돌리고 헌금자명단이나 헌금액수를 주보에 올리는 것보다
훨씬 교묘한 케이스가 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은 목회자의 의도성을 보이는 속물 근성이
아예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케이스 1.
헌금도 헌금통에 자원해서 내게하고, 헌금자명단도 주보에 올리지 않고서
목회자가 마치 헌금과 아무 관계없이 목회를 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는 매주 헌금자 명단과 헌금액수보고서를 받고서는
누가 헌금을 제대로 하는 "내 교인인지-내 밥그릇을 챙겨줄 수 있는지" 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헌금액을 통해서 내 밥그릇으로 확인된 사람에게는 아부하고,
내밥그릇이 아닌 사람은 가능한 멀리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헌금주머니 돌리기와 헌금자명단을 주보에 올리는 목회자보다
훨씬 악질적인 캐이스이다.
서울 S교회 G목사(지금은 원로목사)는 어떤 교인을 불러서
자기 아들이 관련된 미국신학교에 100만달러를 개인적으로 기부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건이 한 두건이 아니다. 교회재정과 아무 관계없이
깨끗하게 보여주는 거룩하게 보이는 목사가 부탁하는데 어떻게 들어주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정작 G목사의 통장안에는
설교집의 판권과 인세로 받은 30억원의(300만달러가 있었다)
현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나중에 아들이 예수S교회를 할 때에 교회에 빌려주었다고 고백하였다.
케이스 2.
L목사는 새교회 초창기에 오픈 당회라는 것을 열었다.
누구든지 당회에 참석할 수 있고 발언할 수 있다는 대단히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본인은 교회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다고 설교시간에 강조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픈 당회에서 어떤 멋모르는 성도가 교회재정운용의 투명성에 대하여 발언을 하였다.
결국 이목사의 목회행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자존심을 상할대로 상한 L목사 왈
"성도님은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교회재정운용에 대하여 발언하냐?"
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한마디로 개망신을 준 것이다.
당사자와 그 장면을 보았던 교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결국 위선자인 목사 밑에서 더 이상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교회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L목사의 새교회 목회후반에는 단기선교나 북한선교에 뻔질나게 나갔다.
공식적으로는 교인들에게 헌금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 돈과 무관한 목사인 것처럼 행세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재력이 있어보이는 교인들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선교헌금을 받아간 것이다.
물론 그러한 돈은 개인적으로 사용되었는지 100% 선교헌금으로 사용하였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지출증명서나 영수증이 없었다고 후에 재정감사위원들이 보고한 적이 있다.
그러한 이중적인 행위는 공개적으로 예배시간에 헌금주머니 돌리고,
매주일 헌금자 명단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위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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