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속박과 자유일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구약은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옥죄이지만 신약이라고 하는 복음은 우리를 그런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 필요도 없으며, 다만 규정된 대로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별로 생각할 필요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열심히 성경을 해석해서 변화하는 환경에서 보다 더 충실하게 지킬 수 있기 위해서 다양한 규정들을 만들어냅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율법의 포괄적 규정을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랍비들은 새로운 규정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런 구약의 번거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이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식의 표현은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구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그에 가까운 뉘앙스를 주는 어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신앙심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 이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목숨과 바꾼 그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심하게 그들을 사단의 무리라고까지 정죄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왔으므로 구약의 율법체계는 그들에게 더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을 생명 자체로 믿어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무언가 허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믿었다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겼을 것입니다.
율법 준수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전면 폐지할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절충식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며, 정경화 작업에서 구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도 그 한 배경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조화라는 선택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조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복음이 상당 부분 빛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약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 순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감동을 받게 되고 그 감동을 바탕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집단적이고 군집적인 작용보다는 개별적이고 상황적인 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개인 우선주의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 사람이 처한 환경이 다르고 생각하는 유형이 다르며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 역시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다양성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다양성은 큰 시각으로 보면 면밀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4복음서의 경우만 하더라도 각각의 복음서는 개별적이고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신학의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원 복음으로 간주되는 자료를 신학자들은 ‘Q자료’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 자료는 이 원 자료의 또 다른 형태로 마태와 누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스티븐 스몰리인데 그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물론 요한복음도 자신들이 모은 자료를 전승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신학적 시각에 맞게 개편했다고 주장합니다(S Smalley. “요한신학” p 43).
마가복음과 Q자료가 원 복음의 자료로 다른 복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일부 시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린다스는 요한복음의 나사로 이야기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요한이 예수로 인해서 죽었다 부활한 한 사람에 관한 또 한 편의 알려지지 않은 전승을 근거로 작성한 ‘세련된 작문’이라고 믿고, 이는 기름부음 사건 때문에 베다니에 위치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와 혼합되었고, 요한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수난 설화와 관련지어졌다고 그는 논증했습니다(B Lindars. Word and Sacrament in the Fourth Gospel p383~6).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각각의 신학적 차이에 따라서 이해가 다르고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러도 그것을 이해하는 청중의 차이를 하나님이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식별하고 분별하게 되며 행동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표현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분별과 식별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처한 환경과 입장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부할 수 있는 재량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재량권을 사용함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써 서로의 판단과 분별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은 성령의 도우심에 근거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판단은 독단이라고 폄하하는 일은 이기적인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판단할 때 성령께서는 자신 안에 이미 담겨져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성경지식을 갖추게 되면 분별력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지식이란 성경공부 뿐만 아니라 성경을 많이 읽어서 감동을 깨닫게 된 지식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이 자유로움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이 아니라 방종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차이를 혼동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공동체를 위해서 때로는 부분적으로 절제되고 억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내려놓음’인데, 스스로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을 때 그 분별은 건강한 것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는 이런 내려놓음이 부족함에 기인한 것으로써 독선적 태도를 불러왔습니다.
다양성과 통일성은 그리스도인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할 수 있는 사람이나 가르침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고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태도 역시 구약적 배경에서 온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는 분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존재하고 있음을 주님은 “죄 없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성을 보고 음욕을 생각했다면 이미 간음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욕적인 생각을 합니다.
죄인 줄 알면서 죄를 범하는 일은 신약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일상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것 역시 우리들의 일상사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며, 따라서 의인은 아무도 없으며, 그런 자유로움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얻어지는 죄 사함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이며, 죄를 짓는 일을 선택하든지 짓지 않는 일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각 사람의 자유재량에 속하며 그것은 결국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 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마귀로부터 참소를 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강박감을 만들어내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또 다른 율법이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해 무디어 있다면 이 또한 방종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곤고한 자들입니다.
갓피플 장봉운 목사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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