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나아갈 때와 머물 때 - 김기석 목사

흔이 할아버지 2006. 11. 20. 08:12

나아갈 때와 머물 때
민9:15-23
(2006/11/19)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덮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늘 그러하였다.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으며, 밤에는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다.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렇게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고, 또한 주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 동안에는, 진에 머물렀다. 그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 날 동안 오래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명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만 머무를 때도 있었다. 그 때에는 그 때대로 주의 지시에 따라서 진을 치고, 또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나곤 하였다.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아침이 되어 구름이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낮이든지 밤이든지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때로는 이틀이나 한 달이나 또는 몇 달씩 계속하여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 곳에 진을 친 채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름이 걷혀 올라가야만 길을 떠났다. 이렇게 그들은 주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고, 주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께서 모세를 시켜 분부하신 대로, 주의 명령을 지켰다.]

• 知機
그리스도의 평강이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마음은 고요합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참 슬픈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떨어진 낙엽이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우리 마음인 듯  싶어 쓸쓸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구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광풍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몰리는 곳으로 달려가기에 분주합니다. 신도시 후보지로 달려가고, 뉴 타운으로 달려가고, 재개발 단지로 달려갑니다. 기독교인들조차 덩달아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바야흐로 돈은 누가 뭐래도 가장 각광받는 유사 신(quasi-god)이 되었습니다. 교회조차도 돈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은 요즘 개신교인들이 줄고 있다고, 큰일이라고, 개탄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신앙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들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3)

제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날이 흐리면 우산을 들고 나가고 찬 바람이 불면 목도리를 챙길 줄은 알지만, 이 시대가 짜장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습에 순응할 뿐입니다.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압제자가 제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그 일에 적응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수련의들이 교수들에게 욕을 먹고 얻어터지면서 수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자괴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폭력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관행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문제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노예화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참을성 있게 노예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시고, 저들을 그냥 두면 죽을 때까지 종살이를 계속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들을 광야로 인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혼은 어떤 형편입니까? 기독교인은 하늘의 機微를 알아차리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과제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붙박혀 있는 우리의 눈길을 거두어 더 깊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하나님은 우리 곁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눈이 가리워있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굳어진 우리 마음이 한번 갈아엎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도리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말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을 뒤덮었습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습니다. 성경에서 구름과 불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민수기의 기자는 구름이 성막에 덮였다고 말하면서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이라고 재차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중 구조로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성막 한복판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음을 알고 있고, 지성소의 한 복판에는 십계명 돌판이 든 증거궤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자칫하면 우리의 관심이 구름과 불에 집중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 상징일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구름과 불은 하나님을 드러내면서도 숨기는 것이라 해야 옳을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구름과 불을 넘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왕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너무도 그리웠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는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만큼 아버지가 더욱더 그리워졌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한탄을 했습니다. “아아, 아버지의 손을 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신다면 그 손을 꼭 껴안으련만. 내 아버지요 스승이며 빛이신 그분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입술에 담아 그 손가락마다에 입을 맞추리라!” 그가 이렇게 아버지를 만져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한탄하는 동안, 머리에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편지가, 당신 손으로 직접 쓰신 편지가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친필이라면 그분의 손과 맞먹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의 가슴에서 큰 기쁨이 솟구쳤습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사람을 찾는 하느님>, 95쪽)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거룩의 현존인 성막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진리’야말로 구약에서 말하는 구름과 불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인격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삶이 곧 길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 sweet surrender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떠날 때와 머물 때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성막을 뒤덮고 있는 구름과 불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하루만 머물 때도 있었고 며칠 동안 머물 때도 있었고 몇 달 동안 머물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여건이 좋아 더 머물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바로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내 경험, 내 판단, 내 편의대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곳에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의 시인과 지혜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3:5-6)

믿음이란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 가운데서 꾸준히 기다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믿음이란 또한 ‘내려놓음’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에 살면서 우리 영혼은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쉬십시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마음에 흘러들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좀 바쁘게 지내는 것 같다면서 염려를 하십니다. 저도 한 동안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결코 짓눌리지는 않습니다. 꾸준히 하나님께 내 삶을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요구받을 때 저는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먼저 가늠해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 그렇다는 확신이 들 때에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확신이 들지 않으면 거절합니다. 그래서 결정한 일을 수행할 때는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내가 만나는 이들 속에 긍정적인 생각과 힘을 심어주기를 청하고 나아가면 어떤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을 내적으로 강화해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주께서 가라시면 가고, 머물라 하시면 머물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사는 순간 우리 삶의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 교회: 생명의 생태계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압제와 예속의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등의 새 땅을 향해 나아가자면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든든한 영적인 지원군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희망 발전소이고, 상처입은 영혼의 쉼터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한 제일 큰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목회자들로 하여금 예수정신의 핵심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시대 정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세속의 물결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현실의 문화를 추종하는 순간 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khart)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다는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하늘을 가리켜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해서 초월과 갱신과 희망의 원리를 민족과 세계 앞에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가 우리끼리만 흐뭇한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돈의 지배를 벗어난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크기의 신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나눔이 부족해서입니다. 우리 마음에 금송아지가 세워질 때마다 하나님이 손수 쓰신 돌판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돈에게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순간 하나님의 뜻은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나누고, 섬기고, 돌볼 때 우리 삶은 놀랍게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배와 학습과 실천을 통해 이런 삶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가슴 벅찬 소명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10735

 

'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 성탄을 보내면서  (0) 2006.12.26
12월 24일 대표기도문  (0) 2006.12.24
06년 10월 대표기도문  (0) 2006.10.29
8월 27일 대표기도문  (0) 2006.09.03
공평  (0) 200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