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함인지 배짱인지...
인생의 평안함은
성적순도 아니요
잘생긴 외모 때문도 아닙니다
이상하리만치 잘 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는데 뭐 특별한것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부지런 한 것도 아니고 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합니다
안 되는 나를 보고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대꾸할 명분이 없습니다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합니다
혼자 말로 하나님은 머하시나 중얼거리다 맙니다...
당당함인지 빼장인지 모를
그의 마음을 보면서 그의 자신감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답답해합니다
노력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하는 많큼 열심히 살아가는데
내 처지가 참으로 한심하고 정말 가련한 비둘기 같습니다
꺼칠한 내 얼굴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번질한 기름기로 그의 삶을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며
그의 당당함은 나로 더욱 작아지게 만듭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어느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애꾸든 땅만 한번 걷어찹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시편10 : 6절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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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기를
좋아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의인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죄를 안 짓고 이웃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을 세상은 의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똑 같은 기준으로 의롭다 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성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화가 중요하다 보니까 함께 성화를 주장하면 그곳의 사상과는
아무 상관 없이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화되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생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여지고 하지 못하는 자신도 한번쯤은
해 보고 싶은 것이 성화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화 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천국에 들어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명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잠언24 : 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의인이 일곱 번 넘어졌다는 말씀은 자기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넘어졌다는 말씀 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넘어졌더라도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일으키시기 때문 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육적으로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겠지만
다시 일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의인은 세상에서는 넘어질지라도
영원히 넘어지지 않는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넘어져도 일곱번 다시 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진다고 말씀 합니다 그 재앙은 사망을 말씀 하는 것입니다
너무 잘되는 것 부러워 하지 마세요
그들은 요동치도 않고 그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의인과 악인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함께 공존합니다
악인은 자기의 잘 되어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기는 신앙 안에 서
있기 때문에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넘어질 수 없는 환경에 도달했기 때문에 왠만한 세상
풍파에도 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기의 자신감을 표현합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마음 먹은대로 순풍에 돗을 단 것처럼 이루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스스로 장담하면서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장담하지 마세요... 장담하는 사람은 반드시 엎드러 질 것입니다
의인은 장담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뜻에 달려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더 바라고 나는 할 수 없지만 약속을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