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 사무엘하 문제의 정답 및 해설
정답
① | ① | ⑥ | ③ | ⑪ | ② | ⑯ | ①②③ |
② | ④ | ⑦ | ① | ⑫ | ① | ⑰ | ③ |
③ | ④ | ⑧ | ①②④ | ⑬ | 당신 | ⑱ | ③ |
④ | ③ | ⑨ | ④ | ⑭ | ① | ⑲ | ①③④ |
⑤ | ① | ⑩ | ①②③ | ⑮ | ② | ⑳ | ①②④ |
해설
2.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일은 여호와의 거룩을 침해하는 것으로 율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금지한 실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하나님의 흠 없으신 거룩함에 투영되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성소에 모셔진 하나님의 궤는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호기심에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일생일대의 기회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의 궤를 들여야 본 까닭에 (오만) 칠십 명이 죽자 겁이 난 이스라엘은 기럇여야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무려 70년 동안이나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삼상6:19-7:2).
당시 이스라엘의 어떤 성읍도 인구가 오만을 넘는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만”이라는 성경의 기록은 사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더더욱 국경지대에 위치한 당시 벧세메스의 총 인구가 오만이 넘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오만”은 오기로 보입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하였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첫째는 다윗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입니다. 둘째는 통일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인 이벤트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데 무려 삼만 명을 동원하여 대형 종교적이자 정치적인 행사를 열었습니다.
7. 아비나답의 집은 하나님의 궤를 칠십 년 동안 모셨지만 웃사가 죽은 후, 오벧에돔의 집은 석 달 동안 하나님의 궤를 모셨을 뿐이지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차이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는 무려 70년을 머물렀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아마 아비나답의 손자 아니면 증손자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말하자면 웃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가정에 모셨던 모태신앙인 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보면서 자란 웃사는 하나님의 궤에 대한 경외심이 점차 떨어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궤를 겁이 나서라도 만질 수가 없었을 텐데 덥석 손부터 나가서 언약궤를 붙잡았던 것이죠.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고 시작하였을 때에 그 아무도 시작부터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일에 더하여 그만 웃사의 결정적인 잘못으로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9. 등장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
② 시바는 므비보셋의 종
③ 미가는 므비보셋의 아들
④ 이스보셋은 사울의 막내아들
등장인물들을 몰라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까지 알게 되면 그들 간의 사랑, 알력 그리고 질투 그리고 생각까지 읽는 이들에게 살아나옵니다.
11. 죄에 무디어지면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창피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은 밧세바가 이방인 헷 사람의 아내이었기 때문에 더욱 막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마땅했지만, 다윗은 밧세바와 스캔들을 공공연하게 저지릅니다. 이 정도 되면 옆에서 누가 충고를 하더라도 듣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이 옳다고 외골수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고 지혜롭던 다윗이 왕인 자신을 지배자로, 백성을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게 되었다면 너무 많이 나갔나요? 현대라면 독재자로 가는 지름길을 달려가고 있었다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닙니다.
13.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비유를 들어 말하였던 죄는 타인의 소유물을 도둑질하였을 때에 도둑질한 죄로, 원주인에게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여기에 더하여 부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윗은 사형을 판결하였지만, 다윗은 그 죄를 지은 자가 바로 자신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이 비유를 다윗에게 들려주면서 다윗 스스로 밧세바로 인한 자신의 심각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지만, 주관적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런 하나님 앞에 패역한 죄를 짓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는 바로 남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선지자 나단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윗에게 외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여러분의 곁에 나단과 같이 자신의 잘못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14.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는 바후림에서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 나가는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므이는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유다 지파인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긴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던 일을 한탄까지 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시므이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② 사울 족속을 칼로 죽였으니 여호와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은 물론 그의 자식들을 죽인 일이 없었으니 잘못된 이유입니다.
③ 다윗은 아브넬에게 자신이 아내로 삼았던 사울의 딸 미갈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아브넬의 전향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이미 다른 남자와(베냐민 지파) 결혼을 한 후이었습니다. 미갈과 결혼하였던 남자는 아내를 힘으로 빼앗기게 되자 미갈을 따라 바후림까지 따라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삼하3:16). 바후림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뼈아픈 역사를 남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의 다윗에 대한 저주는, 첫째 사울 일족을 죽인 일이 없는 다윗에 대한 무고(誣告)이며, 둘째 연연히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도전이라는 두 가지 죄악일 뿐입니다.
16. 마하나임으로 도망간 다윗을 도운 세 사람은 다윗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입니다.
① 랍바 사람 소비 : 랍바를 죽인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의 아들로 다윗이 랍바를 죽이고 그 지역의 통치자로 삼은 인물 (삼하10:1)
② 로데발 사람 마길 :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을 따르는 자(삼하9:4)이었습니다. 마길은 므비보셋을 거두어 왕자로 대우해주는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③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 : 바르실래는 부자로 길르앗 지역이 항상 아람의 침략을 당하여 왔었습니다. 그후에 다윗이 왕이 되면서 안정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다윗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로글림으로부터 요단을 거쳐 마하나임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함께 하면서 위기에 처한 초라한 다윗 왕을 공궤한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의 전쟁물자 보급은 다급한 전쟁 상황에 처한 다윗 왕 진영에 사기를 북돋아 주었을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19.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른 후 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다윗이 겪은 많은 어려움은 현대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은데, 다윗이 어려웠을 때에 다윗을 도왔던 친인척, 대표적으로는 조카 요압이 다윗을 많이 돕기도 하지만 어렵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다윗의 여자 문제로 밧세바 사건을 겪기도 하였고, 또 수많은 왕자들의 후계자 다툼에서 압살롬의 쿠테타와 아도니야의 반역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20. 웃사는 레위인이기는 하였지만 고핫 자손은 아니어서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율법까지는 몰랐을 개연성이 큽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자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았는데, 만약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궤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기셨다면 하나님 스스로 보호하셨겠지요.
우리 신앙생활에서 “열심”은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열심도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것이며, 결국은 순종입니다. 열심도 하나님 사랑의 마음을 알아 공동체에 덕을 끼치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율법이니까 두려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순종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