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칼빈
칼빈, 기도에 대한 설명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해석하기로 하자.
44. 넷째 기원
다음에 있는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계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서-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 10 : 31)-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신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롬 17 : 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일임하여 그가 먹여 주시고 보호해주시도록 한다.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일로 믿음을 실천하게 하신다.
어떤 학자들은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 "초실체(超实体)적인" 빵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유수 같은 이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께 양육자의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이 기원은(마 6 : 11) 불완전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모독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것이 당연한데, 땅의 근심 걱정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 일에 끌어넣는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
이런 (철학적 사색의) 생각은 마치 아버지의 축복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음식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딤전 4 : 8) 한 말씀은 쓸데없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신체의 영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것을 앞에 두셔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남은 두 가지 기원으로-천상 생활에 속하는 기원으로-인도하시고자 하셨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둔한 것을 고려하셨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신 정도로 만족하고 부정한 계략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우리는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된다고 명하셨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양식이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세의 글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노력이나 노고나 우리의 손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레 26 : 20, 신 8 : 17-18 참조). 사실 음식이 풍부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영양있게 변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는 가난한 사람 못지 않게 부자에게도 필요하다. 풍부한 포도주와 양곡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주리고 목말라 넘어질 것이다.
"오늘" 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라는 말과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한다. 우리에게는 보통 이런 욕망이 한정없이 불타듯 하며, 여기에 다른 악이 더 붙게 된다. 우리는 소유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할 때에는 쾌락과 오락과 허식과 기타 사치에 허비한다. 그러므로 그날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여주시니, 내일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물건이 풍부히 들어와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의 소유가 계속 불어나게 하시며 유효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소유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까지도 주께서 시간마다 조금씩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자부심이 강하여 좀처럼 믿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면서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특별한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신 8 : 3, 마 4 : 4)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예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물질적인 수단으로 생명과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그의 권능만이 그 생명과 힘을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보통 반대되는 예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즉, 가끔 빵의 힘을(또 지팡이의 힘이라고도 하신다) 꺾음으로써 먹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지 않고 쇠약해지게 하시며(레 26 : 26) 마시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하신다(겔 4 : 16-17, 14 : 13 참조).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무수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나, 소유가 풍부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산적한 재물을 믿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사실은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철저히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들의 탐욕을 감춘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 온통 쏟아놓는 것이라야 한다. 또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즉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분께 구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권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신 8 : 18 참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점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당하고 무해한 노고에 의해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 부르지만, 사취(诈取)한 것과 강탈한 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얻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든 간에, 우리 자신의 기술과 근면과 손으로 얻은 것같이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수고가 참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